심리학

자존감과 의사소통의 관계

마실 2026. 2. 22. 12:44

들어가며

자아를 찾는 것은 인류의 오랜 과제이다. 과거, 자연에 대한 과학적 고찰이 부족하던 시절 자아를 채운다는 것은 무엇으로 채워질지 모르기 때문에 사뭇 위험한 행위였다. 이러한 이류들로 인해 초기 인류는 신앙적인 것에 많이 기대었다. 신은 절대적 진리를 표상하며, 절대적 진리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모든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따라서 신의 뜻을 따르는 행위는 잘못될 수 없다는 연역적 도출이 가능하다. 이러한 논리 구조 속에서 나 자신을 찾는 행위는 완벽한 것으로 여겨졌고, 중세까지 이러한 세계관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신앙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채울 경우 반대되는 것들을 탄압한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과 십자군 전쟁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각자의 신을 인정하지 않아 일어난 사건으로 인간이 신의 대리인으로 행한 행동들이 절대 완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점차 쇠락하게 되었다. 이후 인류는 초월적 진리를 따르기보다 인간 내면의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철학과 인문학이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하며 근대적 실존주의가 등장하였을 무렵 자아를 찾기가 꽃을 피운다. 카프카, 카뮈, 사르트르, 하이데거와 같은 사상가들이 실존이라는 단어 그대로 왜 살아가고 있느냐는 질문을 중심으로 자아 찾기를 심화시켰습니다. 자아, 자존감은 모두 존재를 채우기 위한 다양한 명칭이며, 본 리포트에서는 이러한 자존감이 의사소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자존감이란 무엇인가

대자존재라는 것은 비어 있는 존재의 상태를 전제로 말한다. 존재는 끊임없이 비어 있는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즉자를 피하기 위한 실존의 노력이며, 끊임없이 자유를 향해 갈망하는 인간의 의지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란 단편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법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 앞으로 나그네가 다가간다. 우락부락한 문지기는 나그네에게 이 문을 지나갈 수는 있지만 무시무시한 것이 기다리고 있으며, 자신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말해 줄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문을 열면 다시 자기와 같은 문지기를 넘어서 가야 한다고 말한다. 겁에 질린 나그네는 그 문 앞에서 평생을 기다리다가 죽게 된다. 이 이야기는 자아라는 것을 찾는 과정에서 좌절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인간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자의 상태로 살아가는데 그것을 채우는 순간.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인간 개인의 의지에 따라 판단하여야 하고, 자신을 채운 것이 완벽하지 않다는 공허 속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허를 통한 진리를 찾는 종교 또한 존재한다.

 

불교는 비움이라는 것을 부처의 세상으로 가기 위한 가장 큰 진리로 본다. 여기에서 비어 있음은 현상학적 ‘에포케’와도 유사한데, 비움은 대상의 표음과 표의를 모두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에포케에 대한 의미를 나타내는 미술 작품 중 하나이다. 파이프를 보며 우리는 그것을 파이프라 부르기로 한 언표 장의 약속을 생각해 낸다. 즉 의미는 공동의 관념으로써 존재한다. 그 관념은 약속에 불과할 뿐이고 약속을 지우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존재 자체로서 대할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관념을 지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불교의 신자들은 지우는 연습을 하는 것이고, 부처가 살아온 삶을 흉내라도 내보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의 진리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 또한 부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른 것에 기인한다.

이처럼 자신을 채우는 일은 도무지 험난해서 정답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문제의식, 진리를 향한 사고 등을 제쳐두고서 현재에 만족하는 방법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자신을 만족이라는 오만한 사고에 빠뜨리면 된다. 가치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금이란 재화가 매우 중요하지만, 가난하고 못사는 사회에선 당장 입에 넣을 빵 한 조각이 더 중요할 것이다. 이처럼 가치에 대한 자신의 기준을 낮추면 된다. 비록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것 또한 만족하란 자기 오인을 하면 된다. 그 순간 만족감은 대자존재를 충만하게 채울 것이다. 그리고 인식은 만족한 자신을 인정함으로써 자존감을 형성할 것이다.

자존감은 결국 본인의 가치판단 여부에 따라 달린 것이다. 높고 깊은 것을 원할수록 그것에 대한 노력의 강도는 강해진다. 때때로 벽을 마주쳤을 때 그 벽을 넘지 못해 좌절하거나 포기하게 된다. 그때 가치라는 것을 본인의 기준보다 낮추고 합리화하면 자존감이 생기는 것이다. 자존감은 결국 자기 오인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자존감이 중요한 것이 아닌, 자아를 찾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파악하려고 하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실존적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의사소통과 자존감의 관계

타인과 상호작용 하는 의사소통은 인류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다. 의사소통은 더 나은 인류 발전을 위해 여러 일들을 해왔다. 하지만 예전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의사소통의 방법은 평등하지 않다. 인간은 개인의 기질 모두가 천차만별이다. 물론 비슷한 이도 있겠지만 이는 분명 “비슷함”이다. 인간은 거시적으로 살아 온 환경 언어나 나라 등을 차치하고 나서도 머리카락 길이 혹은 숨을 쉬는 횟수 등 세세한 것 하나하나가 다르다. 그리고 그것은 한데 모여 귀납적으로 하나의 개인을 만들어 낸다. 그런 와중 개인이 내린 혹은 사회가 정한 선택의 문제로 우리는 계급에 직면하게 된다. 현대사회 역시 사회구조적으로 그리고 인식적으로 계급이 존재한다. 이러한 계급들은 평등한 의사소통을 함에 있어 큰 방해 요소다.

학력이 높고 좋은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당당하게 말하고 그릇 됨에 있어 분노를 참지 못한다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칭송한다. 이는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옳지는 않다. 반면 가난하고 권력이 없는 사람이 당당하게 말하고 그릇 됨에 있어 옳은 말을 하게 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달라지기 때문이다. 인식이라는 것이 그렇다. 사람은 상대를 판단할 때 매우 빠른 속도로 정보를 습득해 결정지어 버린다. 그리고 그 인식으로 대상을 자존감이 높은 존재로 판단하거나 자존감이 없는 존재로 판단해 버린다. 자존감은 본인의 선택 문제를 넘어 타인의 시선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존감을 채우는 것은 자기가 완벽하게 행복하다는 자기 오인에서 나오지만 한편으론 타인의 시선으로 결정짓게 되기도 한다. 즉 자기방어 기재가 잘 발달한 사람의 경우 자존감으로 자신의 성을 잘 쌓으면 타인의 시선에 의해 흔들리는 일이 덜하겠지만, 반대로 자존감을 드높이는 일을 하고 나서도 방어기제가 잘 쌓여있지 않으면 언제든지 타인에 의해 자존감을 떨어트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즉 자화라고 부른다.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자신의 정체성. 우리는 이런 것을 피하기 위해 올바른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민하고 탐구해야 한다. 자존감이란 자기 오인 가득한 단어는 기피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존감은 역사를 관통해 시대정신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향한 도전이 이루어졌을 때 생성된다. 수많은 석학이 세계를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고도 그 한계를 느끼고 본인의 목숨을 끊은 것은 자존감의 이유가 아니다. 그것은 옳은 것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그것을 관철시키지 못하는 본인의 한계에서 일어나는 비극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존감을 통한 기만적 의사소통의 방법보단, 나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타인을 이해하려고 의사소통해야 할 것이다.

 

내생각 및 정리

자존감과 의사소통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자존감이란 자기 오인은 상대방을 낮추거나 혹은 자신을 망치는 용도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력은 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다. 게으름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큰 저해 요소다. 앞서 말한 노력은 좋은 스펙을 쌓고, 토익점수를 올리고 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누군가에 대한 실존적 노력과 탐구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자존감이 아닌, 진짜 본인의 존재 이유를 탐구할 때 진정한 자존감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존감은 타인을 무시하지도, 함부로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라는 것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을 본인의 노력으로 깨닫기 때문이다. 자존감을 찾는 삶보단 실존의 삶을 찾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삶의 가치가 될 것이다. 그것이 올바른 의사소통으로 향하는 길이다.

 

참고자료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장폴샤르트르 저, 2009

『에드문트 후설』, 살림출판사, 박인철 저, 2013